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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는 유명한 아침이 참 많다. 성산일출봉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아침, 우도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리며 맞는 아침, SNS에 자주 올라오는 그런 화려한 아침들 말이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소중한 아침은 따로 있다. 바로 보목동에서 맞는, 아주 평범하고 조용한 아침이다.
보목동에 작은 집이 생긴 뒤로, 제주에 머무는 날이면 나는 종종 같은 루틴을 반복한다. 매일은 아니지만 꽤 자주. 그리고 이 루틴을 반복할수록 점점 더 이 시간이 좋아진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물 한 잔을 마시는 것이다. 별것 아닌 습관 같지만, 밤새 마른 몸에 물이 스며드는 그 느낌이 하루를 여는 신호처럼 느껴진다.
물을 마신 뒤엔 창밖으로 바다를 한번 바라본다. 날씨에 따라 바다의 표정이 매번 다르다. 흐린 날은 흐린 대로, 맑은 날은 맑은 대로 나름의 운치가 있지만, 역시 가장 반가운 건 오늘처럼 푸른 하늘이 나를 맞아주는 날이다.
모자를 눌러 쓰고 운동화 끈을 조인 뒤 밖으로 나선다. 이 순간, 하루 중 가장 가벼운 마음이 든다.
집을 나서서 보목포구 쪽으로 조금 걷다 보면 동네 샛길로 접어드는 길이 나온다. 관광객들은 잘 모르는, 동네 사람들만 아는 그런 골목길이다.

진등산쉼터
그 길 끝자락에 진등산쉼터가 있다. 보목포구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자리 잡은 이곳은, 포장마차 같기도 하고 카페 같기도 한 애매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는 이곳을 수십 번 지나쳤지만 아직 한 번도 주인장을 본 적이 없다.
하하. 그래서인지 갈 때마다 이곳은 나만의 무인 카페처럼 느껴진다. 누가 운영하는지도 모르는 채, 나는 그저 이곳 벤치에 잠시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잠시 바다를 바라본 뒤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이번엔 구두미포구 방향이다.
이때부터는 걷기보다 살짝 뛰는 쪽에 가깝다. 아침 운동을 겸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숨이 조금씩 차오르고, 다리 근육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할 무렵, 갑자기 시야가 트이면서 섶섬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 순간이 항상 좋다.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랄까. 바다 위에 우뚝 솟은 그 초록빛 섬을 볼 때마다, 마치 오늘 처음 보는 것 같은 새로운 감동이 있다.
소천지, 물 위에 뜬 한라산
섶섬을 잠시 바라본 뒤 포구 옆 숲길로 들어선다. 이 구간부터는 바다를 바로 옆에 두고 걷게 되는데, 파도 소리가 유독 크고 선명하게 들린다. 파도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걷다 보면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다.
조금 힘들다 싶을 무렵, 소천지에 도착한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이곳은 정말 또 다른 세상이 된다. 멀리 보이는 한라산이 소천지 수면 위에 그대로 비친다. 고개를 들어도 한라산이 보이고, 고개를 숙여 물을 내려다봐도 한라산이 보인다. 하늘과 물, 두 개의 한라산을 동시에 보고 있는 셈이다.
몇 번을 와도 이 광경은 볼 때마다 신기하다. 사진으로 아무리 담아봐도, 실제로 그 자리에 서서 느끼는 감동의 절반도 담아내지 못한다. 그래서 요즘은 아예 사진 찍기를 포기하고 그냥 눈에, 마음에 담아두려 한다.
소천지를 지나 돌뿌리가 가득한 올레길 구간에 들어서면 다리가 조금씩 무거워진다. 울퉁불퉁한 돌길이라 발걸음도 자연히 조심스러워진다.
하지만 하수처리장 길을 지나 검은여 구간에 들어서면 신기하게도 발걸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검은여는 내가 이 코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다. 이곳 해녀 작업장 주변은 내가 즐겨 찾는 무늬오징어 낚시 포인트이기도 하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간단한 간식을 챙겨와 피크닉을 즐기기에도 더없이 좋은 곳이다.
이곳에 앉아 있으면 딱히 뭘 하지 않아도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바다만 바라보고 있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그런 신기한 장소다.
검은여를 지나 걷다 보면 칼호텔 부지의 넓은 잔디밭이 눈에 들어온다.
이 넓은 잔디를 볼 때마다 나는 괜히 골프채를 들고 나가 공을 한번 쳐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웬만한 골프장보다 더 멋진 풍경이 아닐까 싶다. 푸른 잔디와 바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섬들까지. 그 조합이 참 좋다.
어느새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힘들다는 생각보다 기분 좋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몸은 힘든데 마음은 가벼운, 그런 아이러니한 상태다.
허니문하우스가 있는 언덕길에 들어서면 조금 숨이 차기 시작한다. 경사가 제법 있는 구간이라 여기서부터는 확실히 체력 소모가 느껴진다.
하지만 카페 앞 전망대에 다다르는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그동안의 모든 수고를 단번에 보상해 준다. 바다가 짠 하고 모습을 드러내는 그 순간의 쾌감이란. 멀리 푸른 바다와 섬들이 펼쳐지고, 방금 전까지 가쁘게 몰아쉬던 숨도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어느새 가벼워진다.
여행이 아닌 일상이 된 풍경
잠시 풍경을 눈에 담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한다.
곧 소정방폭포에 도착한다.

검은 현무암 절벽을 따라 떨어지는 시원한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속에 쌓여 있던 스트레스도 함께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다. 폭포 소리가 워낙 시원해서 잠시 멈춰 서서 눈을 감고 듣기만 해도 좋다.
다시 힘을 내어 자구리해안까지 달린다. 어느새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지만, 자구리해안 야자수 그늘 아래에 서면 그마저도 기분 좋은 피로로 바뀐다.
한숨 돌린 뒤 편의점에 들러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을 산다. 이 한 잔이 이 아침 루틴의 마지막 퍼즐 조각 같은 존재다. 차가운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참 행복한 아침이다."
보목동에 작은 집이 생긴 뒤, 제주에 머무를 때면 매일은 아니더라도 종종 이런 아침을 맞이한다.
누군가에게는 여행지의 풍경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이제 일상이 된 풍경이다. 아마 그래서 더욱 소중한지도 모른다. 특별한 것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아도 될 만큼, 그것이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
제주의 특별한 아침을 여행이 아닌 일상으로 누릴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내가 보목동에서 얻은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싶다.
보목포구에서 시작해 섶섬을 바라보고, 소천지를 지나 검은여와 허니문하우스, 소정방폭포와 자구리해안까지 이어지는 이 길을 걸을 때면, 나는 가끔 스스로를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보목동에서 맞는 아침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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